삼국지 220년, 후한은 공식적으로 멸망하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새롭게 조위(曹魏)를 세우며 삼국 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다. 오랜 전란 끝에 질서가 재편되고, 혼란 속에서 새로운 정치 체제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조비는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했으며, 이는 이후 위, 촉, 오 삼국의 공식적 대립 구도를 확정짓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후한 왕조의 몰락
후한 말기는 황건적의 난부터 시작된 끊임없는 내란과 지방 군벌들의 부상으로 인해 황실의 권위가 무너진 시대였다. 황제는 이름뿐이었고, 실질적인 권력은 각지의 제후들에게 넘어갔다. 그중에서도 조조는 탁월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허창에 헌제를 옹립하고, 중앙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조조조차 헌제 폐위를 서두르지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한실의 신하로서 명분을 지키면서,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여러 차례 왕위를 넘기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끝내 생전에는 황제를 폐위하지 않았다. 조조의 목표는 서둘러 황제를 폐위해 반발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민심을 다지고 기반을 다지는 데 있었다.
조조가 죽은 후,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 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는 더 이상 명분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후한 황실을 형식적으로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빠르게 새로운 왕조 수립을 준비했다.
조비의 선양과 조위 건국
220년, 조비는 신중하게 수순을 밟아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냈다. 선양이란 강제나 폭력이 아니라 황제가 스스로 왕권을 넘긴다는 형식을 취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명분을 중시하던 당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조비는 먼저 대신들을 통해 헌제에게 조정이 이미 조씨 가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민심 또한 새로운 왕조를 원한다고 압박했다. 헌제는 끝내 저항할 수 없었고, 조비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된다.
이로써 후한은 400년 가까운 역사를 끝맺었고, 조비는 조위를 건국하며 스스로 ‘위문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수도를 허창에 두고, 새로운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했다.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기초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 통치 스타일을 구축하려 했다.
후한 멸망과 조위 건국의 의미
후한 멸망과 조위 건국은 삼국 시대 구도가 본격화된 출발점이었다. 비록 유비와 손권이 조비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 노선을 걸었지만, 공식적으로 위나라는 당시 중국 대륙의 절반 이상을 통치하는 최대 세력이 되었다.
조비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학을 장려하고, 중앙 관료제를 정비하며, 조조 시기의 군사 중심 체제를 점진적으로 문민 통치 체제로 전환시키려 했다. 그는 문화와 학문을 장려했고, 법제를 정비해 국가 체질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한편, 헌제는 선양 이후 귀족으로 강등되어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후한이라는 이름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이후 삼국 각국의 통치와 명분 논쟁 속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결론
삼국지 220년 후한 멸망과 조위 건국은 난세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조비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며 삼국 시대를 공식적으로 열었지만, 여전히 남은 세력들과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조비의 조위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손에 넣었고, 이는 이후 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도 안정을 얻기까지는 수많은 피바람과 격동을 겪어야 했다.
후한의 몰락과 조위의 성립은 난세 속에서도 질서는 재편되고, 권력은 끊임없이 새 주인을 찾아간다는 역사의 진리를 웅변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전환은 삼국지의 무대를 더욱 장엄하고 극적으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