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212년부터 213년에 걸쳐 벌어진 제1차 유수구 전투는 적벽대전 이후 긴밀했던 유비와 손권 연합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이 전투는 단순한 영토 싸움이 아니라, 삼국시대 초반 세력 균형이 변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유비와 손권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충돌하면서, 삼국의 구도는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갈등의 배경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형주를 발판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는 형주의 남부 지역을 장악했고, 장강 유역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손권 역시 강동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형주 일부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공동 점유’라는 모호한 형태로 형주를 나눠 사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비가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손권 측은 불만을 키워갔다. 특히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기 위해 익주로 진출하면서 형주 방어가 느슨해지자, 손권은 기회를 노리고 군대를 움직였다.
이때 손권은 유수구를 넘어 형주 동부를 점령하려 했다. 유비의 부장 관우가 이를 막으면서 양측은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것이 제1차 유수구 전투의 시작이었다.
관우와 손권군의 충돌
유수구 전투의 핵심 인물은 관우였다. 관우는 유비가 익주 정벌에 전념하는 동안 형주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손권은 여몽과 능통 등 강동의 유능한 장수들을 보내 관우를 압박했다.
처음에는 손권군이 기세를 올렸다. 여몽은 강을 따라 빠르게 진격했고, 능통은 민첩한 기동전으로 관우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관우는 뛰어난 방어 전술로 대응했다. 그는 주요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해 손권군의 기세를 꺾었고, 병참선을 확보해 장기전에 대비했다.
특히 관우는 단순히 방어에 그치지 않고, 틈틈이 반격을 감행해 손권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유수구 일대는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강을 사이에 둔 소모전이 장기화됐다.
전투의 결과와 영향
장기간의 대치 끝에, 양측은 명확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 휴전했다. 손권은 형주 동부 일부 지역을 확보했지만, 형주 전체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유비 역시 익주 장악에 성공했지만, 형주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갈등의 씨앗을 남겼다.
제1차 유수구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삼국시대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적벽대전 이후 유지되던 유비-손권 연합은 이 시점부터 실질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후 유비와 손권은 외교적으로 형주 분할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고, 이는 훗날 관우의 죽음과 형주 전면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론
삼국지 212년부터 213년까지 이어진 제1차 유수구 전투는 삼국지 초반 세력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한 첫 신호였다. 유비와 손권은 공동의 적 조조를 상대하기 위해 손을 잡았지만, 결국 각자의 이익을 위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관우의 활약 덕분에 유비 진영은 형주의 핵심 거점을 지킬 수 있었지만, 손권과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갔다. 이 전투는 삼국지 전체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후 삼국시대는 더욱 뚜렷한 대립 구도로 접어들게 된다.
제1차 유수구 전투는 난세에서 이익과 생존을 둘러싼 세력 간 긴장과 갈등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