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유비 촉한 건국: 의로 세운 새로운 황조

삼국지 221년, 유비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며 촉한(蜀漢)을 세웠다. 이는 후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이뤄진 결단이었다.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를 세운 데 맞서, 유비는 자신의 정통성과 대의를 걸고 황제로 즉위했다. 촉한 건국은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난세 속 의리와 한실 부흥을 내건 유비의 신념이 관철된 순간이었다.

후한의 몰락과 유비의 결심

220년,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하면서 후한은 공식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에 대해 유비는 깊은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그는 한나라 황실과 먼 친척 관계였고, 평생을 ‘한실 부흥’을 입에 달고 다녔다. 조비가 황위를 찬탈한 것을 ‘역적 행위’로 간주한 유비는 한실을 되살리기 위해 직접 나설 필요성을 느꼈다.

한편 내부 사정도 복잡했다. 관우를 잃고 형주를 빼앗긴 상황에서 촉한 내부를 결속시키고, 위와 오에 대항할 정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황제 즉위는 외부에 한실의 정통성을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유비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부하들의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나서 촉한 건국을 강행했다. 정통성을 강조하며 모든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고, 이는 명백히 후한의 연장선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촉한 건국과 체제 수립

221년, 유비는 성도(成都)에서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국호는 ‘한(漢)’으로 삼았고, 스스로를 한나라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한과 구별하기 위해 후세에는 ‘촉한’이라 불리게 된다.

유비는 제갈량을 승상으로 삼아 국정 운영을 맡겼고, 법정과 방통이 죽은 이후 남은 충신들과 함께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했다. 촉한은 비교적 작은 나라였지만, 뛰어난 장수와 관료들이 포진해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

특히 유비는 민심을 얻기 위해 세금을 경감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실질적인 통치를 강화했다. 외교적으로는 위나라에 맞서고, 오나라에 복수를 다짐하며 군사 재건에도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촉한은 영토가 상대적으로 좁았고, 인구와 자원도 위나라에 비해 부족했다. 이로 인해 유비는 지속적인 외부 팽창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촉한 건국의 의미

유비의 촉한 건국은 단순한 신생 국가 수립이 아니었다. 이는 난세 속에서 ‘명분’과 ‘의리’를 내세운 마지막 정치적 선언이었다. 조조와 조비가 실리와 힘을 앞세운 통치를 펼쳤다면, 유비는 의를 내세워 민심을 사로잡으려 했다.

촉한의 건국은 유비 개인의 꿈이자, 한나라를 존중했던 이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촉한은 후한의 정신을 이어받아 삼국시대의 한 축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또한 촉한 건국은 삼국시대 구도를 명확히 굳혔다. 위, 촉, 오 삼국이 각기 황제를 자칭하며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고, 중국은 본격적인 삼국 분열 시대로 접어들었다.

결론

삼국지 221년 유비의 촉한 건국은 난세 속 의리와 대의를 부르짖는 마지막 불꽃이었다. 유비는 조조와 조비의 실리 정치에 맞서, 한실 부흥이라는 대의를 걸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촉한은 규모는 작았지만, 명분과 정신력에서는 결코 다른 두 나라에 뒤지지 않았다. 유비의 결단은 삼국지 전체에서 가장 숭고하고 비장한 순간 중 하나로 남는다.

촉한 건국은 난세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지키려 한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었고, 이후 삼국지의 드라마를 더욱 뜨겁게 달구는 불씨가 되었다. 의와 신념으로 세워진 촉한은 짧지만 뜨겁게 삼국시대를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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