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238년 ~ 262년 강유의 북벌은 촉한 최후의 저항을 이끈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갈량의 유업을 계승해 수십 년간 북벌을 이어간 강유는 촉한 말기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역사에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강유의 등장과 북벌 재개
강유는 원래 위나라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촉한에 귀순한 이후 탁월한 무장과 지략가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뒤 촉한은 급격히 쇠락했지만, 강유는 오히려 이 상황 속에서도 북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38년부터 강유는 북벌을 재개합니다. 그는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촉한의 존재 이유인 ‘한왕실 부흥’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강유의 북벌은 제갈량의 전략적 노선을 계승하되, 보다 공격적이고 기민한 기동전을 지향했습니다.
특히 강유는 소규모 정예 병력을 활용해 위나라 변경을 끊임없이 공략했습니다. 광원, 음평, 기곡 등지에서 활발한 전투를 벌이며 위나라를 압박했습니다. 그는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북진을 시도하며, 촉한의 존재감을 대외적으로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강유가 처한 현실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촉한은 이미 국력이 위축되고 있었고, 내부 정치 역시 불안정했습니다. 강유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촉한의 마지막 희망을 지탱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강유 북벌의 한계와 고군분투
강유의 북벌은 초기에는 성공적으로 전개되는 듯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한계가 뚜렷해졌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력의 차이였습니다. 촉한은 인구, 병력, 경제력 모두 위나라에 크게 뒤처졌습니다. 강유는 뛰어난 전략가였지만, 현실을 뒤엎기에는 촉한의 기반이 너무 약했습니다.
또한 내부 정치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환관 황호를 비롯한 내정 세력은 강유의 북벌을 지원하기는커녕 오히려 견제했습니다. 강유는 끊임없이 전쟁터에서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중상과 모함에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는 그의 군사적 활동에 큰 제약을 가져왔습니다.
강유는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북벌을 이어갔습니다. 247년부터 262년까지 거의 매년 북벌을 시도했으며, 위나라를 끊임없이 긴장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기곡 전투에서는 위나라 군을 크게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습니다. 강유의 북벌은 결정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고, 촉한은 점점 소모되어 갔습니다. 강유 개인의 역량은 탁월했지만, 쇠락하는 촉한의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촉한 멸망과 강유의 최후
262년, 위나라에서는 사마소가 실권을 잡은 이후, 촉한 정벌을 본격적으로 준비합니다. 263년 등애와 종회가 대대적인 촉한 침공을 단행했고, 촉한은 급격히 무너져 내립니다.
강유는 이 침공에도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전략을 짜고,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버티려 했습니다. 특히 음평 일대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벌였지만, 무리한 상황을 극복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촉한 황제 유선은 무릎을 꿇고 항복했습니다. 강유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지만, 상부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위나라 장수 종회를 설득해 사마씨 일가에 반기를 들려는 반란을 꾀했습니다.
비록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강유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마지막까지 이어진 저항은 촉한의 불굴의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남게 됩니다.
결론
삼국지 238년 ~ 262년 강유의 북벌은 한 인간의 집념과 나라를 향한 충성심이 빚어낸 치열한 투쟁의 기록이었습니다. 강유는 불리한 국력, 정치적 방해, 끝없이 밀려오는 현실의 장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싸우며 촉한의 마지막 혼을 지켰습니다. 그의 북벌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강유가 남긴 의지와 투혼은 오늘날까지 삼국지를 읽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